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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만난지 열흘만에 청혼한 까닭은

MTN감성인터뷰 '더리더' - 지휘자 서희태, 소프라노 고진영 부부
대담=최남수 보도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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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원했던 아버지 반대 무릅쓰고 독학으로 음대가고 유학까지
빈 유학 다음날 아내 만나... 만난지 열흘만에 청혼... 벌써 결혼 20주년
아내는 타고난 성악가... 아침에 일어나 바로 노래불러도 거뜬 '부러워'


베바 음악감독은 모험 '1인7역'한 셈 ... 8개월간 집에도 못가
김연아 아이스쇼서 라이브 반주 세계적으로 드문일
2004년부터 6년째 가족과함께 자선음악회... 재능의 십일조


존경하는 지휘자는 카라얀과 아바도... 대중위한 지휘자되고파
한국음악 세계화 다울프로젝트 추진...국악과 오케스트라 환상 조화


남편은 지휘자로, 부인은 소프라노로 부부가 같이 음악의 길을 걷고 있는 음악 가족. 지난 2008년의 '베토벤 바이러스 신드롬'을 일으킨 지휘자 서희태씨의 가족이다. 클래식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는 시청자들의 인기를 끌며 침체되어 있던 클래식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러한 '베토벤 바이러스'의 탄생 뒤에는 한국 드라마 최초의 예술 감독이자 밀레니엄 심포니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로 맹활약중인 서희태씨가 있었다.



아름다운 리더를 만나는 머니투데이방송 MTN의 ‘더 리더’는 클래식 대중화에 앞장 서 온 밀레니엄 심포니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 서희태씨와 그의 영원한 동반자 소프라노 고진영씨를 함께 만나보았다.

대담: 최남수 머니투데이방송 보도본부장
(답변: 서 = 지휘자 서희태, 고 = 소프라노 고진영)

Q. 아름다운 집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둘러봤는데 너무 아름답습니다. 직접 꾸미신 건가요?

A(서). 네, 저희가 직접 꾸몄습니다.





Q. 아무래도 사모님 손길이 많이 갔을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A(고) 네, 제가 좋아해서요. 제가 여러 가지로 음악 하다가 보면 어떤 도구나 이런 것들 이용해서 좀 해봤습니다.

Q. 가족이 지금 어떻게 되시죠?

A(서) 아들이 있고요, 물론 부부가 살고요. 이번에 큰 아이가 대학에 들어갔고요. 둘째 아이가 딸아이인데 딸아이는 고등학교 2학년, 네 명이 살고 있습니다.

Q. 단란한 가족이 아주 아름다운 공간에서 사시는군요

A(서) 아내 취미 생활이에요. 음악활동 하다보면 보통 스포츠를 좋아하시는 분도 계시고, 아니면 밖에 나가 다른 활동을 하는 걸 좋아하시는 분도 계신데. 제 아내의 유일한 취미이자 활동하는 것이 집에서 가꾸고 집에서 활동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러다 보니...

Q. 음악적 숨결이 아주 잘 느껴지는 그런 공간인 것 같습니다. 두 분께서 음악인이시다 보니까 여러 가지 좋은 점이 일단은 더 많을 것 같아요, 그런 부분에서 먼저 말씀해주신다면 두 분 각각 좀 말씀해주셨으면 좋겠는데...

A(서) 음악적으로 좋은 부분, 사실 저는 아직까지 나쁜 점을 별로 찾지는 못했었어요. 처음 우리가 만나서 결혼했을 때는 어떻게 마음이 그렇잖아요. 부부니까 아쉬운 부분도 느껴지고 이렇게 하면 더 잘할 것 같고 하는 그런 것 때문에 서로 조언을 하다보면 그게 잘 못 받아들였을 때는 그게 마음에 상처가 되기도 하고 그래서 처음에는 그런 부분들이 있었는데, 그 약간의 시간을 지나고 나서부터는 지금까지는 사실은 음악을 같이 한 것은 너무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불편한 점 전혀 없는 것 같고요.

Q. 어떤 부분이 더 좋으신 것 같아요? 같이 음악을 하시니까

A(고) 같이 하니까 힘든 부분들을 서로 채워줄 수 있어서 좋고요. 이해도 가고 서로 힘들 때 제일 위로가 되는 사람이죠.

Q. 아무래도 서로 직업적 이해도가 다른 분들보다 높을 테니까요.

A(서) 정말 진심으로 이해를 할 수 있잖아요. 말을 하는 것도 정말 진심으로 말할 수 있고 처음에는 물론 그런 것들이 마음에 상처를 줬을 수 있는데 지금은 뭐 우리가 결혼한 지 올해가 20주년이거든요. 20년을 같이 살다보니까 이제는 어떤 말을 해도 상처라기보다는 진심으로 하는 말이구나. 그것을 알 수 있으니까 누가 그런 얘기를 해주겠어요.

Q. 두 분이 만나신 게 20주년이면...

A(서) 89년도에 만나서 90년에 결혼했죠.

Q. 어디서 만나신건가요?

A(서) 빈에서 처음 만났는데요.

Q. 두 분이 유학생활하시면서? 조금 어려운 질문이 되겠는데요. 성악가로서 부인에 대한 평가, 지휘자로서 남편에 대한 평가 한 번 여쭤보고 싶은데요.

A(서) 제가 먼저 할까요? 제가 지휘자로 봤을 때, 성악가인 제 아내에 대한 평가는 정말 성악을 위해서 태어났다는 생각을 저는 스스로 하고 있습니다. 제가 같이 유학을 하면서 저도 성악을 공부했었고 지휘도 같이 공부를 했지만 너무 편하게 노래를 하는 거예요.

본부장님 같은 경우도 아침에 일어나면 목이 좀 잠기시죠? 일어나서 시간이 좀 흘러야 평상시 나의 말투가 나오고 말소리가 나오는데, 제 아내는요. 잠에서 깨자마자 바로 노래를 해요. 타고난 성악가라는 거죠. 저는 그렇지 못했어요. 저는 예를 들어서 아침에 노래를 해야 되면 새벽부터 일어나서 운동하고 말을 하고 목을 자연스럽게 만들기 위해서 음식도 먹고 그런 준비시간이 꽤 많이 걸리는데, 저희 아내는 전혀 그런 게 없더라고요.

그리고 노래하는 것을 저는 노래할 때마다 굉장히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공부하는 것에 있어서 이게 학문이다 생각하고 공부를 했는데, 제 아내는 노래하는 것을 너무 즐거워하고 노래연주에 대해서 스트레스도 받지도 않고. 저는 성악을 했을 때는 굉장한 스트레스가 많았었거든요.

그런 면에서 봤을 때 타고난 성악가가 아닐까, 그리고 너무나 아름다운 목소리를 갖고 있고 아직까지도 변하지 않는 좋은 목소리를 갖고 있어서 칭찬만 하면 좀 그렇지만, 사실 성악가 고진영으로 봤을 때는 정말 칭찬할 것 밖에 없습니다.

Q. 지휘자 서희태 선생님은...

A(고) 지휘자 서희태는 봤을 때, 제일 먼저는 항상 존경하고 있고요. 지휘자로서 남편으로서 존경하고 있고, 그리고 성악이라는 것은 제 성악적인 장르만 공부를 하게 되잖아요. 지휘자의 역할이라는 것은 너무나 수많은 음악을 접하면서 거기에 어우러지는 음악들을 만들어내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나가는 그런 작업이기 때문에, 제가 봤을 때는 제가 노래를 부르면서 감동하지 못하는 것, 다른 노래를 들으면서 감동하지 못하는 많은 감동을 받고 새롭게 다른 음악들을 들려줄 때 제가 그런 감동을 받죠. 그래서 존경합니다. 지휘자로서 존경합니다.




Q. 두 분이 같은 무대에 서시는 경우도 종종 있지요. 그럴 때 느낌이 더 다를 것 같은데...

A(서) 과거에는 같이 무대에 선다면, 제가 특히 성악가로 활동을 할 때 같이 무대에 선다고 그러면, 사실 긴장을 좀 더 많이 일반적으로 혼자 설 때보다 긴장을 많이 했던 게 사실이거든요. 왜냐면은 두 사람의 몫이 나한테 오는 거잖아요. 제 아내도 마찬가지로 자기 혼자 무대에 설 때에는 나만 컨트롤하면 되지만 둘이가 무대에 설 때는 남편의 컨디션도 신경이 쓰이고 내 컨디션도 신경이 쓰이고.

또한 제가 같이 무대에 설 때에는 제 컨디션과 아내의 컨디션이 신경이 쓰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혼자 연주하는 것보다는 더 많은 부담감을 가졌던 게 사실인데요. 제가 지휘자로 완전히 전향한 이후에는 저한테 가장 중요한 파트너 중의 한명이 제 아내예요.

예를 들어서, 내가 자선음악회를 해야 된다 할 경우에, 자선음악회라는 것은 말 그대로 개런티도 없고, 거기서 나오는 모든 수익금을 가지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주기 위한 음악회인데. 그럴 경우에 가장 친분이 강한 연주자에게 부탁을 하게 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지휘자로 전향한 이후에는 지금은 제 아내와 연주하는 것에 대한 지휘자로서 일단 스트레스가 없기 때문에 저는 너무나 편하고 또 내가 원하는 것들을 뭘 원하는지 말 안 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잘 받쳐줘서 정말 좋은 파트너라고 생각이 됩니다.

Q. 아무래도 남편이 지휘자로 서시는 무대에는 든든하실 것 같은 느낌일 텐데, 그러시죠?

A(고)네, 믿어주니까 저를 믿어주고 세워서 같이 노래하는 거니까 그만큼 준비도 많이 따라야 되고 또 거기에 대해서 마음의 부담,책임감은 좀 가지고 노래를 해야 돼요. 왜냐면 밖에서 사람들이 생각할 때 남편이 지휘하니까 부인도 무대에 선다. 이런 얘기는 안 듣고 싶으니까요.

Q. 지금 언뜻 언급하셨습니다마는 2004년부터 소아암 어린이 돕기 운동, 자선음악회를 많이 하고 일종의 음악의 나눔 활동 이런 것을 적극적으로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계기가 계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A(서) 사실은 좀 부족한 부분이고 그렇게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닌데요. 제 재능의 십일조를 한다는 마음으로 시작을 하게 된 게 자선음악회의 시초입니다. 많은 것을 받았고 축복도 많이 받았고 한데 그것을 어떻게 내가,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이것을 나누어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제 아내와 같이 한 번 자선음악회를 해보자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재활원 아이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 아이들이 너무나 순수하고 순박하더라구요...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간절히 바라는 그 눈빛에 꼭 이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구요.

그 아이들의 너무 순박한 소원이란 게 있었어요. 어떤 소원이냐면 그 아이들은 수용생활을 하기 때문에 자유롭게 밖에 출입을 못하게 되어 있는데, 편하게 밖에 나가서 햄버거를 마음껏 먹고 싶다는 얘기를 저한테 한 거예요.

어느 아이가. 그래서 ‘그래? 그러면 아저씨가 소원 들어줄게’ 하고 이 아이들을 제가 밖으로 데리고 나오기 시작을 했는데. 그러면서 어떤 생각이 드냐면 우리가 찾아가서 하는 음악회도 참 중요하다. 그런 재활원생들이 있는 곳이나 병원이나 낙도나 소외된 지역을 찾아가서 하는 음악회도 중요하지만 그들에게 정말 문화가 살아 숨쉬는 공연장을 체험하게 해주는 것은 더 중요한 것 같은 거예요.

화려한 불빛 속에서 아름다운 무대를 보고 거기 모여 있는 일반관객들하고 한 번 동화되어 보는 것.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이 아이들을 우리 자선음악회로 초청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려면 참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해요.

차량도 지원이 돼야하고, 대부분 아이들이 휠체어를 타고 다니기 때문에 한 아이마다 한 명씩의 자원봉사자가 필요해요. 처음에는 쉽지가 않았는데 그래도 저희를 믿고 해주셨던 많은 분들이 자발적으로 차량을 협조해주시고 가족들이 나와서 한명씩 아이들을 케어해주시고 그렇게 하셔서 그게 벌써 6년이 되었네요. 6년째 그 아이들을 초대하고 거기서 나온 모든 수익금은 기부를 하고 그렇게 해오던 것이 그렇게 자랑할 것은 아니었는데 그렇게 됐네요.

Q. 그 아이들한테는 굉장히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이 될 것 같아요.

A(서) 그런데요. 그 아이들한테도 정말 잊을 수 없는 기억이기도 하고. 또 저는 감동을 많이 받은 것이 작년에 제가 했던 무대에서 말 한마디도 얘들이 놓치지 않는다는 거예요. 어떤 이야기를 하면은 아 아저씨, 작년에도 그 이야기했어요.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하고요. 또 그 자리에 오는 일반인들이 더 큰 감동을 받아요.

2009년 12월에도 같은 자선음악회를 했었는데, 그게 7회째 자선음악회였는데요. 그 공연장에서 자폐를 앓고 있는 아이들이 몇 명이 왔어요. 이 애들은 스스로의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때는 너무 침울하고 조용하게 있다가 또 어떤 때는 너무 활동적으로 하기도 하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우려를 했었어요. ‘얘네들하고 어떻게 콘서트를 같이 할 수 있을까, 관객석에 있으면서 어떻게 관객들과 어울릴 수 있을까’ 저는 걔네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던 그대로 놔두라고 그랬어요.

그랬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번 12월 달에 크리스마스 캐럴을 주제로 해가지고 크리스마스 캐럴을 부르는 음악회로 자선공연을 꾸몄는데, 캐럴을 부르는데 이 아이가 너무 흥이 났던 거예요. 일어나서 춤을 추는 거예요. 관객 속에서. 그런데 관객들 중에 단 한명도 그 모습에 대해 반감을 가졌다든지 그 모습이 보기 싫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없었어요.

너무 아름다웠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모습을. 그래서 ‘이 아이들이 공연현장에 오는 것, 오게 한 것은 정말 잘했구나.’ 앞으로도 그래서 이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인 책임이다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Q. 아주 마음에 와 닿는 활동이신 것 같고요. 음악을 하시는 분들, 재능을 가지신 분들은 앞서 말씀하신 것처럼 재능의 십일조. 음악이나 재능의 나눔 활동, 이런 부분들은 벤치마킹할 때 상으로도 사용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다음번 주제는 워낙 유명한 이야기라 서요. 간단하게 줄여서 말씀드리면 질문을 바로 드리겠습니다. 베토벤 바이러스, 어떻게 이야기하면 헤어스타일까지 유행할 정도였고 클래식계의 전도사, 서마에 이렇게 유명해지셨는데, 어떻게 드라마에 지휘자 서희태 선생님이 모델로 해서 드라마를 그리고 예술 감독을 맡게 되시고 그런 과정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궁금합니다.

A(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기에 강마에의 모델은 서희태다 이렇게 말씀하시는데요. 모델이 서희태면 서희태 또한 강마에처럼 그렇게 못된 모습으로 나와야 되는데, 제가 그렇게 못된 사람은 아니고요. 제 헤어스타일이나 제가 쓰는 말투나 아니면 제가 지휘하는 모습. 명민씨하고 거의 8개월 정도를 같이 지휘를 가르치고 같이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은 제가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고요.

예술 감독을 맡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사실 제 아내 때문이었어요. 제 아내가 그 전부터 드라마 해신이라든지, 패션70s, 서울1945, 대조영 드라마 주제곡들, 드라마에 나오는 여러 가지 효과음악들 이런 것들을 많이 녹음을 했었어요.

그 당시부터 드라마 PD들하고 음악감독들하고 친분이 있었는데, 패션70s를 할 때 이재규 감독을 알게 되었죠. 그 때 음악감독을 하시던 분이 이필호 음악감독이시고, 그렇게 같이 좋은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재규감독이 저한테 와서 클래식 음악을 주제로 하고 오케스트라를 주제로 하는 드라마를 만들겠다는 거예요. 처음에는 제가 그것을 좀 반대했었어요.

왜냐하면 저는 이재규 감독은 굉장히 아끼는, 저보다 후배기 때문에 아끼는 동생인데, 이 감독이 패션70s를 끝내고 나서 상당한 공백 기간이 있었거든요. 거의 2년 이상의 공백 기간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저는 아끼는 마음으로 조금 더 좋은 소재, 좀 더 성공할 수 있는 주제를 가지고 한다면 훨씬 좋지 않겠는가. 근데 이 감독이 이미 마음의 결정을 하고 왔더라고요. 절더러 형님께서 도와주시면 성공합니다. 합시다.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그래? 두말도 안했죠. 오케이 하자, 그렇게 시작되었는데.

Q. 일반적으로 클래식을 소재로 한 드라마 그러면은 자칫하다보면 드라마의 내용은 좋은데 시청률에 대한 우려가 있었을 텐데요.

A (서) 굉장히 위험한 소재였고 그렇기 때문에 드라마가 시작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거의 이 드라마가 성공한다고 본 사람은 없었거든요. 왜냐하면 당시에 타 방송사에서는 굉장히 대작드라마를 했었어요. 드라마 얘기를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바람의 화원이라는 드라마를 SBS에서 하고 있었고 KBS에서는 바람의 나라, 송일국씨가 주연했던. 그리고 저희 드라마가 MBC에 편성이 됐는데 너무나 큰 작품들이었어요. 작품의 질도 너무 우수한 작품들이었고 예산도 엄청난 차이가 나는 드라마였고.

그래서 MBC에서는 아마도 큰 작품들 사이에서 버리는 카드로 우리 드라마를 선택을 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구요. 그랬는데 이게 완전히 반전이 된 거죠. 저희 드라마가 1등으로 시청률 1위가 되고 대박이 난거죠. 그것도 굉장한 많은 위험의 요소들이 있었던 것이 5부에 콘서트 장면을 굉장히 길게 넣었거든요. 일반적으로 본부장님도 그렇지 않나요? TV 시청하시다가 오케스트라 연주하는 장면이 나오시면 그걸 보시나요? 아니면 채널을 돌리시나요?

Q. 시작부분이 아니면 특히 돌릴 경우가 더 많죠.

A (서) 저도 그렇거든요. 저 또한 음악을 하는 사람이고 하지만, 채널을 돌리다가 음악회 장면이 나오면 내가 정말 듣고 싶은 음악이 아닐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제가 찾는 경우가 아닌 경우에는 다른 것을 보게 되는데. 이 드라마를 시청하는 황금시간대에 콘서트가 나온다는 것은 굉장한 위험요소가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스탭회의를 하면서도 이것을 정말 길게 가도 될 것인가, 굉장히 많은 논란 끝에 넣기로 결정했었는데요. 그 장면, 바로 똥덩어리 송옥숙씨가 첼로로 ‘리베르 탱고’를 연주하고 하던 그 드라마 신이 5부였는데, 그것을 기점으로 해서 저희 드라마가 완전히 대박이 나기 시작한 거죠.





Q. 역시 예상치 못하게 큰 성공을 거둔 것은 발상의 전환인 것 같습니다. 잘 관리해서 서 선생님, 이재규 감독님의 합작품인 것 같은데. 그런 인연이 맺어지게 된 게 드라마 주제곡을 많이 부르셔서 인연이 맺어지게 된 건데, 실제 무대에서 상황을 부른 것 하고 드라마의 주제 이런 건 상당히 다를 것 같은데 어떻게 좀 설명을 할 수 있을까요? 차이를.

A(고) 제가 드라마 음악을 하게 된 것은 드라마 음악이 아침, 점심, 제가 시간을 정해서 갈 수 있는 게 아니고요. 음악감독님이 밤에 12시에 하자, 1시에 새벽에 그런 시간을 많이 요구를 하시거든요. 제가 학교나 일이 끝나고 저녁시간에 이것도 해보면 재밌겠다 해서 시작이 된 거예요. 그래서 하다가 보니까 너무 재밌고, 매주 거의 1년 넘게, 큰 작품들은 1년 넘게 매 주말이 되면 2회씩 제 음악이 나오잖아요.

드라마를 통해서 제 음성이 나오고 이런 게 어떻게 보면 재밌기도 하고 그래서 하게 됐는데, 제가 콘서트 하면서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건 제가 마음껏 매번 다른 컨디션으로 음악을 만들 수가 있는데요.

이건 약간의 기계적인, 드라마에 나오는 극중의 상황과 인물을 살릴 수 있는 음악을 만들어야 되는 거더라고요. 제 느낌과 이만큼의 완성도, 소리의 완성도가 아니라 어떤 느낌, 그리고 그 드라마가 원하는 분위기에 맞춰지는 소리로 가야 되서 좀 틀렸던 것 같아요.

A(서) 악보가 없어요. 그냥 보라고 그래요. 새벽 두시에 전화가 와서, 그 전날쯤 전화가 오죠. 내일 새벽 2시쯤 시간 되냐고 물어요. 특히 이필호 감독이 대개 그러시거든요. 새벽 2시에 뭘하려고 그러냐고 그러면은 ‘와서 노래 좀 해줘’ 그렇게 전화가 오세요.

그러면 저희 둘이 가긴 가요. 저는 새벽 2시에 노래하라면 못하죠. 그만큼 잠기는 시간이고, 아침에도 안 되고 새벽에도 안 되고 저는 천생 성악가가 아닌 것 같고요. 제가 서두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제 아내는 정말 타고난 성악가이기 때문에 새벽2시건, 24시간 언제든지 정말 가능하기 때문에 새벽 2시에 가면 그제야 악보를 줘요. 그리고 잠시 악보를 보라고 그래요.

Q. 그게 그렇게 하는 이유가 있나요?

A(고) 그게 감독이 원하는, 왜냐하면 악보를 미리 줘서 연습을 하고 오라고 하면 이필호 감독이라는 사람의 음악이 아니고 물론 그 분이 쓴 음악이지만, 고진영 화두에 있는 음악으로 바뀌어 가는 거지요. 그런데 이 감독이 추구하는 음악은 어떤 거냐 하면은 본연의 그 당시의 느낌을 그대로 살리는 것. 그래서 노래하는 사람의 소리만 빌릴 뿐이지, 노래하는 사람의 feeling 보다는 음악감독이 원하는 feeling을 그대로 얻어내고자 하는 것이 이 감독님의 지론이세요.

Q. 말 그대로 현장에서 감독해서 목소리를 만들어내겠다 그런 거지요?

A(서) 연습도 못하고 바로 가서 그 자리에서 음 익혀서 바로 부르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 보면 이렇게 해서 음악이 나오나? 클래식 하는 사람으로서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거든요. 근데 그게 정말 좋은 음악으로 나오더라고요. 제가 같이 작업을 해보면서 이필호 감독님한테 많은 것을 배웠었어요.

Q. 유명한 드라마들에서 부르신 주제곡의 목소리의 주인공을 오늘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베토벤 바이러스, 저는 예술, 음악 전문가는 아닙니다만 추론을 해보면 전혀 음악에 대해서도 기초적인 지식이 없을 것이고 특히나 지휘라는 거는 잘 모르는 사람을 실제 아무래도 드라마 보게 되면 전문가들 시각에서는 ‘엉터리다’ 이런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도록 가르친다는 게 보통일이 아니었을 것 같은데 어려움이 많으셨을 것 같아요.

A(서) 저 또한 그런 것에 대해서 굉장히 꼼꼼한 성격을 갖고 있고요. 직접 강마에를 연기했던 김명민씨도 그 부분에 있어서는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꼼꼼한 성격을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하나도 오차가 없어야 마음을 놓고 집에 가고 그랬었어요. 지금 우리가 앉아있는 이 자리에서 명민씨하고 밤을 새워가면서 연습을 하고 새벽에도 연습을 하고 낮에도, 정말 시간 불문이었어요.

Q. 베토벤 바이러스가 탄생한 고난의 흔적이 여기 있습니다.

A(서) 여기에서 지아씨도 레슨을 받았고, 장근석씨도 레슨을 받았고, 김명민씨도 레슨을 받았고. 그랬는데 본인 스스로가 자기가 맡은 역할에 대해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스스로가 틀리면도 하다가 틀리잖아요, 집에도 안가요. 끝까지 하는 거예요. 명민씨 같은 경우는.

근석씨는 좀 달랐어요. 근석씨는 ‘감독님 내일 좀 잘 되겠죠.’ 낙천적이에요. 근데 김명민씨 같은 경우는 본인이 마음에 들 때까지 노력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드라마하고 있을 때도 많은 유명한 지휘자 선생님들께서 저한테 전화가 오셔서 아니 도대체 어떻게 가르쳤기에 그렇게 잘 가르쳤냐고 그런 얘기도 많이 하시고, 누가 봐도 저희 드라마가 나오기 전에 일본에서 노다메 칸타빌레라고 하는 드라마가 나왔었는데, 거기에 나오는 치아키라고 하는 지휘자와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라고 하는 이 두 지휘자의 지휘하는 모습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였었죠.

명민씨가 정말 잘해주었고, 8개월의 고생이 정말 잘한 고생이었다. 스스로가 그 정도 퀄리티와 그 정도 완성도를 만들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던 것이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가 나온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Q. 아무래도 감독하시는 선생님 입장에서는 전문가들이 봤을 때 이게 엉터리가 아니라는 모습을 보여줘야 되겠다는 그런 부담감이 좀 많으셨을 것 같은데...

A(서) 처음에 이 감독께서, 이필호 감독이 저한테 이 드라마를 하자고 했을 때 제가 첫 번째 내건 조건이 있었습니다. 여기 출연하는 배우들은 전부다 개인레슨을 받아야 된다. 적어도 3개월 이상. 그냥 흉내 내는 정도가지고 안되고 본인 스스로 연주할 수 있을 정도의 레슨을 받아야 된다고 그래서, 명민씨가 제일 길게 레슨을 받았고요. 그 다음에는 이지아씨가 바이올린 레슨을. 특히 이 바이올린이라는 악기 자체가 흉내 내기조차도 어렵거든요.

그래서 바이올린 레슨도 이지아씨도 틈틈이 선생님이 따라다니면서 레슨을 했었고. 그렇기 때문에 조금 완성도가 처음에는 드라마 앞부분에는 레슨한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 미숙한 부분도 보였지만 갈수록 완성도가 높아갔던 것도 드라마 찍고 있는 순간순간 계속 레슨을 했었어요. 쉬는 시간에 다른 방에 가서 연습시키고 그렇게 해서 붙여 나갔기 때문에 완성도가 좀 더 높아진 게 아닌가.

Q. 말씀 듣다보니까 드라마를 즐기는 시청자 입장에서야 한번 즐기고 카타르시스 느끼면 되는 거지만 그 뒤에서는 굉장히 엄청난 노력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A(서) 정말 많은 노력을 했었고요. 사실은 집에 못 들어와서 제 아내한테 굉장히 미안했었어요. 처음에는 예술 감독이라는 역할 자체가 제가 출연을 하기로 했었거든요. 거기에 정명환이라는 역할이 있었어요. 그 역할에 제가 출연하기로 하고 그냥 예술 감독은 감수하는 정도의 역할인 줄 알았어요. 아니나 다를까 드라마에 발을 딛고 나니까 제가 했던 역할이 7가지의 역할을 했더라고요.

그러니까 배우들을 가르쳐야 되고, 음악을 선곡해야 되고, 선곡한 음악들을 녹음을 해야 되고, 처음엔 녹음 계획도 없었거든요. 녹음된 음악들을 편집을 해야 되고, 또 드라마 촬영 중에서 음악 콘서트 장면이 있으면 이 감독 옆에서 조연출의 역할을 했어야 되고, 중계차 안에 들어가서도 같이 컷을 하기도 하고...

그리고 대본에 나오는 전문 용어들도 수정을 했어야 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편집실에 가서 편집할 때 sync 라고 하잖아요. 일반적으로 녹음된 음악을 틀어놓고 연주를 해야 되는데 녹음된 음악과 정확하게 딱 맞추는 것, 이것도 굉장히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거거든요. 그래서 편집실에서 편집까지, 그러니까 제가 집에 올 수가 없었죠. 거의 밖에서 살았고.

Q. 드라마 하시면서 방송 전문가로 활동하신 시간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A(서) 저는 방송하는 동안에도 이렇게 많은 녹음을 짧은 시간에 해본 경험을 갖는다는 게 정말 소중한 경험이었고 물론 힘들기도 했지만 그 힘든 것 때문에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Q. 베토벤 바이러스 주제곡을 직접 부르신 걸로 들었는데...

A(서) 주제곡은 아니고요, 베토벤 바이러스는 주제곡이 아니고요. 베토벤 바이러스에 들어가는 노래가 있었어요. 그 노래를 불렀는데. 생명의 양식이라고 하는 프랑크의 곡인데 그게 스토리가 좀 있어요. 제가 제 아내를 시키고 싶어서 시킨 게 아니고요. 드라마가 원래 저희가 16부작으로 제작을 하려고 하다가 방송사에서 증편을 해달라고 해서 좀 더 새로운 소재가 필요해서 그 속에 넣다보니까 어떤 소재를 넣기로 했냐니까 음악 하는 사람들 중에는 요즘엔 그게 거의 없습니다만 옛날에는 치맛바람이라는 게 있었어요.

어머니들이 아이들 뒤를 따라다니면서 사사건건 이게 어떻다 저게 어떻다 그런 말씀을 많이 하시는 부모님들이 계셨어가지고 그런 나쁜 부분들을 드라마에 보여주다 보니까 노래 부르는 사람이 긍정적으로 비춰지지 않잖아요.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옆에 어머니가 이게 잘못됐고 그러니까 그걸 녹음을 하겠다는 사람이 아무도 안 나서는 거예요. 그래서 저한테는 항상 5분이라고 그랬잖아요. 나쁜 거는 다 해줘야 되요. 그래서 제 아내가 녹음을 하게 된 거죠.

Q. 요즘 동계 올림픽 이후에 김연아 신드롬이 대단한데요. 그 아이스쇼 라이브연주를 하신 적 있다고 들었습니다.

A(서) 009년 8월에 국내에서는 최초였고, 세계적으로도 거의 유래를 찾을 수 없다고 제가 들었는데요. 김연아 선수가 출연하는 아이스쇼에 제가 오케스트라를 연주했었는데, 일반적으로 오케스트라 연주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김연아 선수가 연기하는 것은 그 당시에 쇼트 프로그램을 연기했었고 연주했던 곡이 죽음의 무도라는 곡을 연주했는데, 아시다시피 쇼트 프로그램이라는 것은 선수들이 대회를 위해서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기술을 틀림없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집어넣어서 만들어진 프로그램을 쇼트 프로그램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 쇼트 프로그램을 라이브 음악에 같이 맞춰서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에요. 연아 양하고 같이 리허설을 해보면은요, 조금만 음악이 느려지고 조금만 음악이 빨라져도 김연아 선수가 점프를 못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속도가 안 맞으니까. 그래서 이게 아, 불가능한 것인가 우리가 리허설 하면서 굉장히 고민을 했었는데, 또 우리나라에 김연아 선수의 얼마나 많은 팬들이 있어요. 혹시라도 연기를 하다가 실수를 하게 되면 지휘를 맡은 저로서는 엄청난 피해가 예상되는 일이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 연주를 준비하면서 굉장히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고.

제가 다른 연주하면서 스트레스 받지 않는데 그 연주할 때는 악보에다가 김연아 선수가 스케이팅하는 몇 마디에서 어떤 기술이 들어가고 또 몇 마디에서는 점프를 하고 몇 마디에서는 스핀을 돌고 전부다 제가 기록을 해놓고요. 김연아 선수가 연기하는 것을 보면서 철저하게 맞춰서 했어요. 그래서 거의 속도가 빗나가지 않고 연주를 마치고 나서 1초 정도도 시간이 틀리지 않게 다행히 되어서 3번의 공연을 했었는데 3번 다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쳤어요.

Q. 그렇게 공연을 하시고 김연아 선수를 옆에 많이 지켜보시고 하셨을 텐데 이번에 금메달 딴 거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기뻐하셨을 것 같은데, 가까이서 지켜본 김연아 선수에 대해서 평가해 주신다면?

A(서) 첫째, 어린 나이잖아요. 아직까지. 그런데 너무 당차고요. 누구나 그렇게 큰 무대에 가면 긴장할 수밖에 없을 테고. 또 마음에 대한 부담감, 온 국민이 성원하고 있었고 온 국민이 당연히 금메달을 따 주리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엄청난 부담감이었을 텐데 그런 부담감을 즐기는 모습을 봤어요.

인터뷰하면서도 미소가 얼굴에서 떠나지 않고 인터뷰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강심장이다 그런 생각을 했고요. 저희는 아이스쇼가 끝나고 같이 초대받아서 왔던 세계적인 스타들하고 다 같이 식사도 하고 뒤풀이를 같이 하는 모습이 있었는데 거기선 영락없는 소녀의 모습이 보이고 저는 양면성을 많이 봤죠. 너무 예쁜 연아 선수가 이번에 금메달을 따줘서 저는 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Q. 강심장의 모습이 이번 올림픽 때 그대로 나타난 것 같아요. 아사다 마오가 기록을 갱신한 상황에서 나와서 기록을 넘겨버리는... 지금 말씀하신 것 보면 베토벤 바이러스 드라마도 굉장히 어려운 걸 도전하신 것이고, 아이스쇼의 라이브도 남들이 쉽게 도전하기 어려운 그런 것을 하신 것 같은데 음악을 걸어오신 길도 제가 내용을 들어봤더니 그러신 것 같아요. 시작하시는 과정, 어릴 때 음악 시작하시는 게 굉장히 쉽지 않으셨던 걸로 알고 있는데...

A(서) 제가 음악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어릴 때부터였었어요. 음악과 같이 자라났고 제가 어렸을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웠었거든요. 저희 아버님께서 음악을 굉장히 사랑하셔서 누님에게 피아노 가르쳐주시고, 저는 바이올린 가르쳐주시고, 동생은 첼로를 가르쳐주시고 그래서 저희 동네가 굉장히 부산에서도 변두리에 있는 그런 동네였는데, 저희 집은 피아노 트리오를 연주할 수 있는 유일한 집이었어요. 그래서 음악 속에서 자라서 너무 음악이 좋은데 아버님께서는 제가 음악가가 되기보다는 다른 직업을 갖기를 원하셨어요.

그 당시에 어른들이 다 그러시겠지만 의사되기를 많이 바라셨던 것 같아요. 제 친구가 저하고 항상 라이벌 관계에 있는 친구가 있었어요. 너무 친한 친구인데, 너무나 뛰어난 친구였었어요. 음악을 해도 그 친구가 저보다 훨씬 뛰어나고요. 같이 그 친구도 바이올린을 참 잘했거든요. 또 교회에서 같이 생활했는데 교회에서 항상 이 친구는 굉장히 많은 인정을 받고 공부를 해도 이 친구는 너무 공부를 잘해요, 너무 잘하는 정도가 아니고요. 천재라고 보시면 되요. 이 친구하고 같이 경쟁할 것을 생각하니까 사실 너무 깜깜하더라고요. 그리고 음악이 너무 좋았고. 아버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음악을 하게 된 것이 약간의 고난의 길을 걸었지만.

Q. 집에서 지원이 없는 상태였고, 그래서 만능 아르바이트생이다. 어려움을 많이 겪은 이야기를 해주신다면...

A(서) 누구나 젊었을 때 고생은 사서한다는 얘기를 하셨어요. 저희 아버님도 혼자 독학을 하셨던 분이시고, 물론 저희 아버님 때 세대들이 대부분 다 그렇게 생활하셨겠지만 저희들한테 어렸을 때부터 굉장히 자립심에 대해서 많이 강조를 하셨어요. 지금도 그러시지만. 청소년기를 겪고 나서부터는 자립을 혼자 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고 살았던 것 같아요. 워낙 자립심이 강했었고 그래서 그게 힘들다고 생각한 적이 없고요.

Q. 학비를 스스로 벌어서 공부하신 거죠, 그렇게 유학비용 마련하시고 또 유학을 가신 지역이?

A(서) 오스트리아 빈으로, 빈에 도착한 바로 다음날 제 아내를 만났고요. 만난 지 열흘정도 됐나요. 열흘정도 후에 제가 청혼을 했고, 그것도 공부를 하러 간 오스트리아 빈에 도착한 다음날 만나서 열흘 만에 청혼을 했으니 얼마나 황당했겠어요.

Q. 어떤 점에 한눈에 반하신 건가요.

A(서) 그거는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어요. ‘아, 이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저희 아버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저희 아버님께서 너무 황당해 하셨죠. 장인어른도 너무 황당해 하시고 그런데 두 분 다 잘 이해를 해주셨기 때문에 그러고 나서 8개월 정도 지났나요, 그렇게 결혼을 했고.

Q. 그 때 느낌이 어떠셨어요?

A (고)‘아, 이사람이구나. 이제 나타나셨구나.’ 조금 틀렸거든요. 열흘 만에 청혼을 하는 사람도 처음 봤고요. 그때까지 부산 사람을 처음 봤거든요. 부산 사투리를 처음 들어본데다가 너무 착해 보이고, 또 음악을 하는 사람은 음악 하는 사람을 참 만나기를 싫어해요. 왜냐하면 다 알기 때문에 나를 챙겨주는 사람을 만나야지 내가 누구를 챙겨준다는 거는 정말 부담이 되거든요. 같이 음악을 한다는 것은 힘든 거라는 것을 알고 시작을 해야 되거든요. 그런 각오가 없는 상황에서 이 사람을 만나게 됐고 일이 잘 풀린 상황에서 저희가 만난 게 아니라 시작하는 단계에서 만난 거라서 고민을 해야 됐었는데 이상하게도 사람을 보니까 그런 고민이 안 생겨지는 거예요. ‘아, 이 사람인가 보다. 힘들어도 같이 가야되는 사람인가보다’ 하고 결정을 하게 됐어요.

Q. 성악레슨 한 번도 안 받으시고 음대 들어가시고 이런 게 본인이 스스로 생각하시기에 재능이 있으신 것 같은가요.

A(서) 타고난 부분이 많이 있고요. 어렸을 때 아버님께서 바이올린을 가르쳐주셨기 때문에 그 때 배웠던 바이올린이 음감이라든지 그런 것에 도움을 줬었고. 어렸을 때부터 교회생활을 했기 때문에 교회에서 자연스럽게 노래를 많이 하다보니까 목소리 좋다는 소리는 항상 들었고요.

고등학교 은사님이 저한테 결정적인 영향을 주셨는데요. 이분께서 사실은 저희들한테 나중에 대학가면 저희 선생님이 굉장히 재밌으셨어요. 아주 호쾌하신 분이고 지금도 그 선생님이 기억에 많이 남는데, 이 선생님께서 농담처럼 이런 말을 하셨어요. ‘너희들 나중에 대학가면 가요 부르는 것보다는 외국 노래 하나쯤 부를 줄 알아야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좋아진다. 그러니까 니들 이거 하나만 배워라’ 그렇게 우리를 꼬신 거죠.

선생님께서 그 때 뭘 가르쳐 주셨는가 하면 ‘오 솔레미오’하고 ‘Jeanie with the light brown hair’라는 미국 노래하고 몇 곡을 가르쳐주셨어요. 원어로 가르쳐 주신 거죠. 물론 음악책에도 있습니다만 외워서 부르고 그런 것을 잘 안하는데, 그 선생님께서는 일부러 외워서 시험도 보고 그러셨어요. 그 덕에 그것을 외워놨던 것이 대학을 가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죠.

Q. 유학생활 시작 부분에서 같이 만나셨기 때문에 과정상에서 어려움들이 많이 있었을 것 같아요. 물론 두 분이 많이 기대셔서 하신 것이지만은 지금 되돌아보시면 어떠신지...

A(고) 유학생활이라는 게 다 어렵기 때문에요. 그냥 어려운 건가보다 하고서 살았구요. 한국에 들어와 보니까 장기계획도 갖고 노후대책도 갖고 이렇게 멀리 내다보고 계획을 세우지만, 저희는 일단 공부가 좋아서 거기에 가서 있는 것이기 때문에 공부하는 목적 이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사실은 없었어요. 그 와중에 결혼을 하게 됐고 아이가 생기고 새로운 가족이 생기니까 힘든 면들이 많았죠. 그런데 그 과정이 없었다면 지금 이렇게 음악생활을 하고 있을까.

Q. 고진감래라고 생각하셔서

A(서) 경제적으로는 사실은 많이 힘들었었어요. 초반 에는요. 그런데 지금도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 언제였냐고 묻는다면 저는 제가 유학했던 시절이라고 정말 단호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너무나 그 때 제가 유학을 떠났던 것도 제가 정말 존경했던 베토벤이라는 사람의 숨결을 느껴보고 싶어서 갔던 거거든요.

한국에서 물론 정말 요즘 같은 경우에는 국내에서만 공부를 했어도 국제 콩쿠르에 당당하게 입상한 그런 실력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나오고 있는데. 우리가 하고 있는 이 음악자체가 서양음악이고, 그 사람들의 생활하는 것과 그 사람들의 쓰는 언어와 그 사람들의 습성을 모르고서는, 또 그 사람들의 역사를 모르고서는 우리가 정말 서양 음악을 제대로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베토벤의 숨결을 느끼고 싶어서 갔던 유학이었기 때문에 거기서 그 사람들의 베토벤의 후손들을 만나고 그 사람들과 내가 친구가 되고 그 사람들의 언어를 같이 쓰고 동화되었던 그 시간이 제 음악인생을 지금까지 만들어준 가장 큰 원동력인 거죠.

Q. 시작은 성악으로 하셨다가 지휘자로 바꾸신 게 시기적으로 언제가 될까요?

A(서) 유학가기 전부터 오케스트라 지휘에 관심이 많아가지고 공부를 했었는데, 국내에서는 그 당시에는 오케스트라 지휘를 공부하는 과가 없었어요. 그래서 국내에서는 개인 사사를 받고 유학 가서 성악 공부하면서 지휘 과에서 같이 병행해서 공부를 하고 있는 중에 계절학기로 러시아에서 공부를 하기도 하고 그렇게 다방면으로 공부를 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었어요.

Q. 지휘자로 인생의 길을 바꾸신 이후에 성악을 계속 할 걸 그랬나 이런 되돌아보는 후회는 없으셨는지요.

A(서) 단 한 번도 없고요. 지금하고 있는 이 활동이 너무나 제 적성에도 잘 맞을뿐더러 내가 원하는 음악을 많은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같은 하나의 목표를 향해 가준다는 그런 모습이 너무나 저한테는 큰 성취감을 주고. 저는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지금 사회의 많은 회사들이 있고 많은 단체들이 있는데 거기에서도 리더의, 리더가 갖춰야 되는 모습들이 오케스트라 지휘자에게도 많지 않은가 그게 더 관심도 좀 많이 가지고 있고요. 그런 면에서 지휘자로 바꾼 것 정말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Q. 음악을 준비하고 이런 장본인들도 많을 텐데, 조언을 좀 해주신다면 어떻게 준비하면 좋겠다라든가...

A(서) 서두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음악이라는 것이 굉장히 빠르게 완성될 수도 있고 굉장히 느리게 완성될 수도 있는데. 요즘 제 제자들이나 후배들을 보면 너무 급하게 가려고 그런 경향이 보여요. 성공이라는 것이 본인이 원한다고 성공이 되느냐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충분히 준비하고 충분히 스스로가 완성되어지기 위해서 노력을 한다면 성공은 언젠가는 따라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고.

음악적인 성공이라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지는 것이 음악적인 성공일 수도 있고, 또 소수 마니아층에게만 알려지는 것이 음악적인 성공이라고 할 수도 있고, 사람마다 생각이 다 다르겠지만 본인 스스로가 제일 잘 아는 거거든요. 본인 스스로가 내가 연주하고 나서 내 연주가 오늘 좋았다 나빴다 누가 다른 사람이 이야기해주기 전에 본인 스스로가 제일 잘 알아요. 그렇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가 완성도를 높여가면서 기다리면 성공하겠죠.

Q. 성공은 쫓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하다보면 어느새 옆에 와있다 이런 취지의 말씀이신 것 같습니다. 두 분 다 공연하시다보면 사람이라는 게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든 스트레스가 있는데요. 그것을 푸시는 방법들이 좀 있으실 것 같은데...

A(고) 저는 성격이요, 빨리 잊어버려요. 제가 원하는 만큼 풀어내지 못했을 때는 분명히 스트레스가 있어요. 무대에서 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어떤 스스로의 시간을 통해서 ‘다음 연주회 할 때 잘 풀어내야 되겠다’라는 그거 이상은 제가 지난 것에 대한 집착은 안 가지려고 노력을 하거든요. 잘했던 못했던, 그것은 일단 그 장소에서 없어진 음악이기 때문에 그 다음 음악을 준비하는 제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려면 남이 잘했다 못했다는 말에 동요되면 제 자세가 흐트러지니까 되도록 지난 것은 잊어버리고 그 다음 계획을 쫓아서 가게 됐어요. 그래서 스트레스는 조금 많이 안 갖고 가는 것 같아요.

Q. 지난 것은 빨리 잊어버리심으로 풀어나가시는 군요, 선생님은요?

A(서) 저는 그냥 가만히 집에 있어요. 스트레스를 지휘를 하고 나서는 많은 분들이 ‘지휘자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시는데요. 저는요, 반대예요. 지휘를 하면서 스트레스를 해소를 해요. 내가 하고 싶었던 음악을 사랑하는 단원들이 내가 원하는 음악을 연주를 해 주는데... 물론 그게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을 때 뜻하지 않게 될 때에는 스트레스 아닌 스트레스를 받긴 합니다만, 일반적으로는 누구보다도 가장 아름다운 소리가 모이는 게 지휘자 자리거든요.

거기서 항상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있고, 내가 원하는 음악을 만들어 가고 있고 그래서 다른 지휘자들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지휘를 하면서 스트레스가 쌓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지휘를 하고 나서 몸이 많이 힘들죠. 그럴 때는 저는 그냥 가만히 집에 있어요. 운동도 잘 안하고요. 집에 있는 것을 즐기기 때문에...

Q. 앞부분에서도 김연아 선수 얘기를 했습니다마는 그런 부분에서는 일맥상통하는 것 같습니다. 현장과 그 현장에서의 긴장을 즐기는...

A(서)저는 즐거워요. 관객을 만나는 것이 매우 즐겁고요. 관객들에게 저는 이렇게 얘기를 자주 잘 하는 편인데요. 관객들이 클래식 음악회를 이렇게 찾아오시는데 와서 듣다 보면 내가 아는 음악을 과연 몇 퍼센트나 들을까, 관객 입장에서. 일반적으로는 내가 모르는 음악을 듣고 갈 때가 더 많을 거예요. 그래서 클래식 음악회가 대중들에게 인기가 없고 표도 많이 팔리지 않고 그런데. 저는 정말 이런 마음으로 지휘자 서희태가 여러분을 위해서 연주하는데 이런 곡을 연주합니다.

여러분 아시나요? 저도 알아요. 그러면 지휘자 서희태님이랑 저랑 음악 수준이 비슷하네요. 저는 그렇게 얘기해도 좋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대중들이 아는 음악, 대중들이 흔히 많이 들어왔던 음악을 공연장에서 한 번 더 들으면서 클래식에 대한 호감도를 높여주는 그런 음악회를 저는 하고 싶거든요.

Q. 지금 클래식 대중화에 관련된 말씀들을 하셨는데, 대중화로 적극적으로 활동하시는 모습도 많으시고 일부에서는 상업화 아니냐고 반론을 제기하시는 분들도 계시는데...

A(서) 저는 상업화라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고요. 대중음악과 클래식 음악의 경계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 대중음악이 지금에 우리가 얘기하는 클래식이라고 하는 음악들인데, 그 시대에 이런 음악들이 있었다고 많은 대중들에게 소개를 해주는데 어떤 상업적인 게 있고. 제가 얼마 전에 했던 연주회 중에서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오케스트라 소품이 뭐냐면 ‘알비노니의 아다지오(Albinoni Adagio)’라고 하는 곡이 가장 좋아하는 소품이에요. 이 음악을 너무 많이 들었었어요. 유학할 때 혼자 적적하고 외롭고 그럴 때는 이 음악을 틀어놓고 혼자 울기도 많이 울었고.

그래서 그 음악을 너무 사랑하는데, 제가 이렇게 오랜 시간동안 음악활동을 하는데요. 그 음악을 공연장에서 단 한 번도 들어보지를 못했어요. 저 또한 여태까지 연주할 기회도 없었고 그래서 곰곰이 생각한 거죠. ‘왜 그 유명한 음악을 왜 연주를 하지 않지? 내가 해야겠다.’ 그래서 제가 연주를 했었어요. 관중들 굉장히 좋아했고 반응도 좋았고요. 그래서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도 그랬고 지금 제가 하고 있는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도 그렇지만, 우리 국민들은 클래식을 많이 알고 있으면서도 본인 스스로가 모른다고 생각하고 계시거든요.

그래서 저는 거기에 대한 국민들에게 클래식 음악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더 주고 싶은 그런 주의죠. 혹자들은 너무 말씀하신 것처럼 너무 상업적이지 않느냐 너무 쉬운 음악만 추구하지 않느냐고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나를 위해서 하는 음악이 아니고 오케스트라를 위한 음악이 아니고 대중을 위해서 음악을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거든요. 많은 클래식 하시는 분들이 스스로를 위해서 음악을 하고 있는 분들이 많이 계세요. 나의 계발과 매우 중요한 것이고 당연히 그렇게 해야 됩니다만, 우리가 대중없이는 음악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대중을 위한 클래식 음악도 많이 필요하거든요.

Q. 많은 사람들이 소득수준이 올라가면서 음악, 예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데 말씀하신대로 클래식은 어렵다 이런 느낌을 아직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좀 친숙해지려면 어떻게 하면 좋은지 간단한 팁을 좀 조언을 주신다면...

A(서) 우리가 클래식 음악을 스스로가 모른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부터 깨졌으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정말 많은 클래식 음악들을 지금도 듣고 계시거든요. 모든 국민들이. 제가 농담처럼 하는 말이지만요. 이런 멜로디를 들어보셨나요? ‘따라라라라~ 따라라라라~ 잠시만 기다리시면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통화 연결음에 나오는 음악. 하이든의 ‘세레나데’ 현악 4중주.

또 제가 어렸을 때요. 저희 아버님께서 TV 시청을 금지시키셨는데 유일하게 한 프로그램만 볼 수 있도록 해주셨어요. 그 프로그램의 시그널 음악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빰빰빰빰빰 제 1302호의 장학퀴즈가 왔습니다.’ 장학퀴즈 시그널 음악, 이것도 하이든의 트럼펫 협주곡이거든요. 다 클래식이잖아요.

우리가 지하철 타고 다니면 환승역에 가면요, 이런 음악도 나와요. ‘빠라빰빰빠~ 이 역은 몇 호선과 몇 호선이 갈아타는 환승역’ 이렇게 환승역에 나오는 모차르트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직 3악장.

이런 음악들을 항상 듣고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그 음악의 제목을 모르기 때문에 이 음악을 모른다고 이야기를 하시거든요. 개그콘서트에도 클래식이 나오고요. 하다못해 쓰레기차도 클래식을 연주합니다. 쓰레기차가 후진할 때요, ‘엘리제를 위하여’가 나오죠. ‘따라따라따라다라라~’ 이렇게 클래식 음악이 많이 나오는데 쓰레기차가 음악을 연주하는 나라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국민들은 클래식에 많이 노출이 되어 있고 많이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제목까지 다 알아야 하는 것. 이게 우리 교육 시스템에 대한 문제인 것 같아요. 우리가 수능을 보더라도 정확한 답을 하나의 답만 찾아야 되는, 답을 모르면 아예 모르는 것, 논리도 필요 없고 답을 찾지 못하면 틀린 게 되는 이런 교육제도에서 우리가 교육을 받고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그런 기이현상이 아닐까. 우리 국민들은 정말 교육수준도 높을뿐더러 클래식도 많이 알고 있고 즐길 마음만 가지고 계신다면 얼마든지 즐길 수 있습니다. 자신감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Q. 존경하는 지휘자, 나는 이런 지휘자를 앞으로도 닮고 싶다. 이렇게 손꼽아 주신다면 어떤 분이...

A(서) 사실 너무 많아서 말씀드리기는 그런데요. 두 부류로 말씀드릴게요. 첫 번째, 제가 활동하고 있는 이런 면에 있어서 대중적인 지휘자로 가고자 하는 데에 진로에 대해서 존경하는 분은 그 유명했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야입니다. 그 분이 없었다면 클래식 음악이 대중화되는 역할을 할 사람이 없었을 거라고 생각이 되고요. 물론 번스타인이라고 하는 지휘자와 양대 산맥을 이루면서 세계 클래식음악을 대중화 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셨고요. 그런 면에서 제가 카라얀의 모습을 존경하고요.

그 다음에 저의 음악적인 스타일에서 존경하는 분은 클라우디오 아바도입니다. 왜냐하면 카라얀 이후에 베를린 필하모니를 넘겨받아서 상임지휘자가 되었던 분이 클라우디오 아바도인데, 카라얀은 굉장히 독재자였었습니다. 정말 강한 카리스마였고요.

그런데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지휘를 맡으면서 베를린 필하모니에는 사랑이 넘쳐나고 민주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어요. 한동안 그것으로 인해서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결국은 아바도의 성품과 닮아서 음악이 다시 따뜻한 음악으로 베를린 필하모니가 바뀌었거든요. 음악적으로는 클라우디오 아바도, 또 진로의 면에서 봤을 때는 카라얀 그렇습니다.

Q. 존경하는 성악가, 닮고 싶은 성악가는?.

A(고) 제가 맨 처음에 유학을 갔을 때 어린 나이에 유학을 갔어요. 남편을 만나기 전에 제가 빈으로 유학을 가서 처음에 그 가수를 보고 ‘아, 나는 노래하면 더 이상 안 되겠구나’ 하고 느낀 정말 너무 멋진 가수가 있었는데 그 분이 에디타 그루베로바라는 체코 분이세요. 무대에서 하나도 실수가 없는 분, 어떤 소리에 누가 아무도 얘기할 수 없는 그런 분이세요. 겉멋도 없고 그렇다고 너무 진실하기만 한 소리도 아니라 그 사람이 소리를 내면 그 역할이 되어 버리는 거예요. 오페라 아리아 안에 그 사람이 그 역할이 되는 거예요.

그런 모습을 보고 노래를 한다면 저만큼 정확하게. 그분이 지금까지도 유럽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데요. 자기 스스로를 너무 잘 관리를 하는 거예요. 자기를 너무 넓히지도 않고 그렇다고 사람들 앞에 너무 드러내서 ‘자기가 이런 사람이다’라는 것을 알리는 것도 없이 자기의 소리를 참 잘 관리해서 하시는 분이 계시고요. 미렐라 프레니라는 그분은 노래를 들으면 가슴이 따뜻해져요. 음악을 너무 아름답게 느끼면서 가는 분이구나, 따뜻한 노래를 부를 때는 미렐라 프레니를 생각하고 고음이나 굉장히 정확한 노래를 불러야 될 때는 에디타 그루베로바를 생각하면서 그렇게 노래를 많이 했어요.




Q. 시청자 여러분들도 두 분의 유명한 성악가, 지휘자 연주를 들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 질문인데요, 두 분 앞으로의 계획이, 꿈일 수도 있고 계획일 수도 있고 있을 것 같은데 마무리 답변 좀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서) 저는 지금 굉장히 중요한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 한 가지가 있는데요. 그게 바로 다울 프로젝트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면 한국음악의 세계화 작업이에요. 국제 언어가 있는데 그 국제 언어는 바로 영어잖아요. 국제회의에서 통용되는. 음악에 있어서도 국제 공통어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오케스트라입니다. 우리의 음악을 외국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우리 국악을 연주하는 것, 아름다운 일이고 반드시 우리 전통을 지켜줘야 되는 일인데 문제는 외국에서 우리 국악을 연주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의 음악, 우리의 소리를 오케스트라로 만들어서 외국 사람들도 우리가 없이도 연주할 수 있는 그런 풍토를 만드는 것. 우리가 지금 연주하고 있는 베토벤, 모차르트 전부다 외국음악인데 그 사람들 없이도 우리가 배워가지고 와서 연주하고 있잖아요. 그거하고 똑같은 것처럼, 우리의 음악을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한국음악의 진정한 세계화가 아닐까 그래서 그것을 하기 위한 다울 프로젝트를 제가 현재 2년 반 동안하고 있고요. 음악감독은 지평권이라고 하는 드라마의 음악감독과 같이 이 작업을 하고 있는데 ,그것을 발전시켜서 언젠가는 한국 음악을 외국 사람들이 연주하는 날이 올 수 있도록.

Q. 이름을 다울이라고 지으셨는데 어떤 의미가 있나요?

A(서) 다함께 어우러진다. 다울 프로젝트. 저는 다울 프로젝트를 만들면서 항상 두 가지 버전의 음악을 만드는데, 첫 번째 버전은 오케스트라만 연주할 수 있는 버전을 만들고요. 두 번째 버전은 이 오케스트라에 크로스오버해서 우리나라의 국악기를 같이 넣는 버전. 같은 음악이고 같은 길이로 작곡하는데 두 가지 버전을 항상 만들어요. 그렇게 해서 지금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Q. 많은 성과를 이루시기를..

A(서) 꼭 그렇게 되겠습니다. 다울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이 꼭 왔으면 좋겠습니다.

Q. 그렇게 되기를 꼭 기대하겠습니다. 성원하겠습니다. 오늘 음악인 서희태, 고진영 부부. 만난 지 열흘 만에 청혼을 하시고 청혼을 승낙하실 정도로 사랑에 열정이 있으신 분들이 음악에 열정을 발휘하셔서 클래식 대중화에 앞장서고 계십니다. 앞으로도 우리 음악의 세계화에 적극적으로 나서시겠다는 큰 포부를 가지고 계신데요. 오늘 짧은 시간 바쁘신 시간에 여러 가지 좋은 말씀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A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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