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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 인터뷰] 시인 황동규, 구원으로부터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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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자의식


하: 선생님, 요즘 건강은 좋으시지요?

황: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하: 바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영문과를 졸업하시고 젊은 시절에 영국 에든버러에 유학을 다녀오셨습니다. 아마 우리나라 많은 시인들 중에서도 영문과 출신인 분들이 많은데, 선생님께서는 서울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가르치시고 어떻게 보면 평생을 영어를 하신 분인데 영국 시 또는 구미 시와 우리나라의 시가 근본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황: 서구라파 시는 우리나라 시보다는 자의식, 언어의식이 강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시도 서구화가 많이 되었기 때문에 편차는 별로 없을 것입니다. 자의식이란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개인주의와는 다른 것인데 인간으로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식입니다. 이것이 우리나라 전통 시보다는 강합니다. 워즈워스, 엘리엇트나 예이츠, 릴케도 그렇지요.

하: 선생님께서는 교수와 시인으로 활동하셨습니다. 이 둘이 갈등하지는 않던가요?

황: 예술은 가르치는 것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보여줘야 하지요. 보여주는 것을 가지고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가르치는 것과 보여주는 것은 기본적인 차이입니다. 그 점에 있어서 미국이나 구라파의 시인들도 직업 가운데 가장 시간이 많은 직업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학교수를 하는데 그러려면 정말 싸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좋은 시가 나오기 힘듭니다. 제가 마술사가 아니기 때문에 힘들지요. ‘지금부터는 보여줍니다, 지금부터는 가르칩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안 되지요.

하: 선생님께서는 1938년생이시고, 한국적으로 말한다면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태어나셨고, 여덟 살 경에 1945년 8.15 해방을 맞으셨고, 12-3살에는 6.25라는 우리 민족의 비극을 맞이했고, 대학시절에는 4.19와 5.16을 겪으셨는데, 한국 현대사의 여러 가지 중요한 방점이 찍히는 그런 시대를 다 겪어 오셨습니다. 그런 시대적 배경이 선생님 시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황: 말씀하셨지만 유년시절에 태평양 전쟁을 겪었고, 소년시절에 6.25를 겪었고, 청년시절에 4.19와 5.16을 겪었는데, 나의 삶이 매끈한 삶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도 매끈한 삶을 사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진정한 의미의 평화를 모르고 산 셈이죠. 그 후에도 우리가 남북관계 때문에 평화로운 삶을 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점이 내 시에 영향을 미쳤고 그래서 내 시에 ‘행복’이라는 단어가 없을 겁니다.

하: 그래도 중년 이후에는 ‘환하다’라던지 행복과 관련된 시어들이 많이 보입니다.

황: 행복이라기보다는 매끄럽지 않음 속에서의 깨달음 혹은 매끄럽지 않은 것도 사랑할 수 있는 자세 같은 것을 ‘환하다’라고 표시했겠지요.

하: 매끄럽지 않다는 말은 굴곡진 삶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황: 그렇지요. 요즘 젊은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우리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지요. 예를 들면, 과 선택도 그렇고 (제가 영문과를 처음부터 택하려고 했던 것이 아닌 것처럼), 나는 처음에 음대 작곡과에 가고 싶었는데 못 가게 된 이유가 어렸을 때 음악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아서 그랬겠지요. 그 때는 가르쳐줄 사람도 없었고 배울 수도 없었고, 악기도 만져보지 못해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음악과 가장 가까운 장르인 시를 택한 셈인데 아마 지금이라면 국문과에 들어가기 쉬웠을 겁니다. 그 때는 세계문학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6년 동안 배운 영어를 통해서 책을 읽으려고 영국을 간 셈이니까 마음대로 할 수 없었고, 그 다음에 내가 만약 자유로웠다면 번역가가 되었지 대학교수가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렇지만 주어진 교수직을 마다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번역으로는 생활이 안 되었으니까요. 그런 여러 가지 상황이 있었을 것입니다. 요즘 사람 같으면 고통스럽다고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매끄럽지 않은 것이 삶의 근본이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인간 본질에 대한 추구

하: 선생님 20세에 이전에 쓴 초기 시에 「즐거운 편지」 라는 작품이 있지 않습니까? 이 시를 아마 한국인들이 선생님 시 중에 좋아하는 시 중 하나입니다.

황: 저로서는 조금 유감입니다. 초기 작품이니까요.

하: 많은 평론가들이 이 시를 보고 능동성을 이야기 합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사랑은 ‘기다린다’는 의미가 컸습니다. ‘당신이 가면 나는 기다리겠소’와 같이 당신의 자세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시에서는 내 기다림의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이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20세의 나이에서 할 수 없는 말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시는 나는 기다린다 등의 내용인데 선생님께서 그 나이에 갑자기 문학적 통찰력이 생길 수는 없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황: 6.25 전쟁을 겪으면서 말하자면 기다림으로 해결 될 수 없는 실존적인 사랑의 실체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때는 벌써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주위에서 볼 수 없었습니다. 나의 전 시인들처럼 사랑을 노래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당시 아마 실존주의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실존주의를 내가 비록 다 이해는 못했을지라도 실존주의가 가지고 있는 어떤 분위기라든지 또는 핵심적 요소 같은 것들은 체득했을 것 아닙니까? 또, 그 당시 유행하던 것이 실존주의입니다. 당시 한국에서 이해한 실존주의는 본질에서 벗어나 세기말에 가까운 것이죠. 세기말적인 허무라든가. 실존주의는 상당히 의지가 강한 것입니다. 실존주의의 기본은 인간은 인간이 만드는 것이지 본질이 없다는 것 아닙니까. 선택을 통해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싸움을 안 해본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진짜 실존주의 작품을 쓰기는 힘들었겠지요.

하: 선생님께서 그후 「비가」라는 연작, 「풍장」 연작을 쓰시지 않으셨습니까. 다른 시인들에 비하면 연작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렇다면 하나의 관통된 주제를 두고 연작을 구상하시는 것인가요? 아니면 시대적인 이유가 있나요?

황: 미리 생각해 두었겠지요. 나는 어떤 주제가 생겨났을 때 끝까지 파고들고 싶은 욕망이 있었습니다. 「비가」는 제가 유아세례까지 받은 기독교인이었는데, 기독교를 잃어버리게 된 인간의 몸부림에서 나온 것입니다. 고등학교 때 어머님의 지나친 권유로 종교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것에 대한 자동적인 반발도 있었을 겁니다. 내가 1년 동안 다닌 교회는 매주 예수의 재림이 가까워진다, 금방 일어난다고 얘기했습니다. 주로 이사야, 예레미야, 묵시록 등을 중심으로 “당장 예수가 재림한다. 그러면 14만 4천명은 구원을 받는데, 우리는 그 14만 4천 명에 속한다.” 라고 했죠. 그러다가 대학에 와서 니체를 읽으면서 종교, 기독교를 잃은 것이지요.

하: 제가 「비가」를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젊은 날의 어떤 장중한 어두움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황: 일종의 기독교를 잃은 어두움이죠.

하: 선생님 30대 시절 시를 보면 분위기가 많이 밝아집니다. 농담도 많이 하시고, 바퀴도 굴리시고요.

황: 사회에 대해서 발언도 많이 하게 됩니다.

하: 사회에 대한 발언도 무거운 것이 아니고 상당히 가벼워집니다. 그러니까 주제가 가볍다는 것이 아니고 표현 자체가 가볍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황: 아마 내가 가벼워지고 싶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비가」만 하더라도 어감 전체는 무거웠거든요.

하: 그리고 아마 「버클리풍의 사랑노래」 라든지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다」과 같이해서 「풍장」 연작을 시작하셨습니다. 오래도록 「풍장」을 쓰시고 마무리하셨는데요.

황: 십여 년 썼습니다.

하: 「풍장」은 인간의 죽음과의 대결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황: 맞습니다. 죽음과의 대결일 수도 있고, 소위 죽음과 친해지는 것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대결이라고 볼 수도 있고, 아예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친해지자 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과 친해지게 되면 정신적으로 많은 짐이 덜어집니다. 죽음을 피한다고 피할 수 없지 않습니까?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인 것이지요. 즐기면 삶이 상당히 밝아지기도 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삶의 짐 가운데 많은 것이 덜어집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이 금방 실천되는 것은 아닙니다. 훈련이 필요하고 상당히 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합니다.

하: 그렇다면 그 과정은 선생님의 정신적인 죽음과의 친함에 대한 훈련 과정이었습니까?

황: 네, 그렇습니다.




시의 양식과 음악

하: 선생님께서 「풍장」 연작을 마무리 할 즈음에, 선생님 시에서 독특한 형식이 나타납니다. 극서정시 양식이라는 것을 독자적으로 개발하신 것 같습니다. 극서정시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간단하게 설명 부탁드립니다.

황: 극서정시는 다시 말하면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시가 감정의 토로라든가 또는 사회현상을 고발한다든가 어떤 풍물을 그린다든가 인데 그것보다는 그 안에 인생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극이라는 것은 소위 기승전결이 있고 그 안에서 한 인간의 운명이 바뀌죠. 안 바뀌게 되면 극이 재미없죠. 그것처럼 단순한 감정토로나 묘사가 아니라. 시적자아가 바뀌는, 변화를 겪는 작품을 쓰고 싶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아마 「사는 기쁨」이겠지요. 「사는 기쁨」은 8페이지 정도로 인쇄되었으니 긴 시 이지요.

하: 주인공의 변화와 어떤 삶의 태도까지 변해야 한다는 것이 담겨 있는데요.

황: 때때로 사생관도 변합니다. 그리고 선불교에 빠진 게 선불교 책을 읽으면서 부터입니다. 읽으면서 느낀 것이 무엇이냐면 우리의 깨침이라는 게 일종의 스토아적인 용맹정진을 하다가 일순 에피큐리니즘으로 빠지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선불교의 깨침이 서양의 두 사생관을 꿰뚫는 매력이 있습니다. 상당히 빠져있었습니다. 에피큐리니즘을 쾌락주의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쾌락주의는 헤도니즘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에피큐리니즘은 원자론을 받아들였습니다. 우리가 소위 우연히 원자들이 합쳤다가 죽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죽음이라는 것에 괴로움을 당하지 말자는 것이지 쾌락주의는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정신적인 쾌락주의라 착각할 수도 있지만 에피큐리니즘입니다. 예를 들면 삶과 죽음이라든가 재산이라든가 모든 것에서 해방되는 것이죠. 어떻게 보면 선불교의 깨달음입니다. 앞에 스토아, 스토이시즘이 있어야 한다, 두 개가 꿰뚫어져 있어야 선불교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구라파 식으로 깨침을 설명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하: 그것과 관련해서, 선생님께서 ‘내려놓다’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구라파에서는 쓰지 않는 말 같습니다.

황: 우리는 시인이나 소설가를 표할 때 ‘그 친구는 자신을 내려놓지 않았어’ 라고 하면 무언가 모자란다는 뜻으로 씁니다. 그런 이야기는 구라파에는 없습니다. 도교나 불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구미에서는 ‘내려놓다’라는 개념이 없는데 ‘세계에 대해 조금 더 넓은 시야를 가진다’ 정도가 비슷하겠지만 ‘내려놓는다’는 감각까지 포함된 용어입니다. 그런 용어는 없지요. 다른 말로하면 ‘마음을 비운다’는 말로 대신 할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겠지요.

하: 대개 선생님께서 술을 한 잔 기울이실 때 음악을 같이 들으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주로 어떤 음악을 들으시는지요?

황: 가사가 없는 음악은 다 좋아합니다. 가사가 있는 음악은 글을 쓰는데 지장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페라 음악을 거의 듣지 않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음악은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모차르트의 후기 작품들입니다. 슈베르트의 후기 작품들은 최고의 걸작입니다. 현악 5중주, 피아노 소나타 3곡은 정말 대단한 작품들입니다. 베토벤이 죽고 난 다음에 1년 반 동안 세계 최고의 음악가가 슈베르트입니다. 그 다음 상당한 공백이 있다가 브람스, 바그너, 케르펠리등이 나왔습니다.

하: 선생님은 작곡가가 되려다 포기하셨죠?

황: 네, 작곡가가 되려고 공부하다 포기한 이유가 어느 음악회에 갔다 나오다가 친구는 휘파람을 정확하게 부는데 나는 정확히 못 불렀거든요. 발성음치라고 하죠. 작곡가한테 발성음치는 괜찮습니다. 펜데르키의 경우는 청음이 떨어졌지만 현대 음악가로 괜찮거든요. 성악가가 아니면 괜찮습니다. 다시 삶이 주어지고 육체가 똑같은 조건이라면 작곡가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음악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상당히 복잡합니다. 쇤베르크 이후로는 서양 고전 음악이 죽었습니다. 그전에는 베토벤이나 모차르트밖에 몰랐으니까요. 요즘은 클래식 음악회에 청중이 별로 없지 않습니까. 아마 내가 건강했다면 여행가나 탐험가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도 들어요.

하: 최근에 「나폴리 민요」를 쓰셨는데 30년 전 나폴리 여행을 다녀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황: 나는 시를 쓰기 위해 여행을 간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여행은 즐겁고 시를 쓰는 것은 괴롭기 때문입니다. 여행을 좋아하기 때문에 여행이 나중에 시 속으로 들어온 것이 많지요. 그 중에 나폴리 민요는 30년 전 여행이 잊혀져 있다가 최근에 재생 된 것이지요. 하지만 영원히 숙성 안 되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을 다 시로 쓰면 시를 쓰기 위해 여행을 다니는 것이니까요. 여행은 여행입니다.

하: 선생님, 젊은 시절부터 여행을 많이 다니셨는데, 기억에 남으시는 여행이 있으신지요?

황: 분위기에 따라 다릅니다. 시처럼 하나를 꼽을 수는 없습니다.

하: 선생님 오늘 인터뷰를 이 정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황: 네, 애쓰셨습니다.




*황동규黃東奎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일명 '국민 연애시'라고 할수 있는 「즐거운 편지」의 시인. 등단작인 「즐거운 편지」로 주목을 받았지만 이에 안주하지 않고, 쉼 없고 경계 없는 사유로 발전을 거듭해온 시인이다.
본관은 제안(濟安)이다. 1938년 평안남도 숙천(肅川)에서 소설가 황순원(黃順元)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946년 가족과 함께 월남해 서울에서 성장했다. 1957년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에서 영어영문학 학사 및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66∼1967년 영국 에든버러대학교 대학원에서 수학한 후 1968년부터 서울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강의했다. 1970∼1971년 미국 아이오와대학교 연구원을 지냈으며, 1987∼1988년 미국 뉴욕대학교 객원교수로 활동했다.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대 영문과 명예교수와 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1959년 서정주(徐廷柱)에 의해 시 「시월」, 「동백나무」,「즐거운 편지」가 <현대문학>에 추천되어 시인으로 등단했다. 초기에는 사랑에 관한 서정시가 주로 썼지만 두번째 시집 『비가(悲歌)』(1965)부터는 숙명적 비극성을 받아들여 구체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1966년에는 정현종(鄭玄宗) 등과 함께 동인잡지 『사계』를 발행했다. 1968년 마종기(馬鍾基), 김영태(金榮泰)와의 3명의 공동시집 『평균율 1』을 출간하고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열하일기」, 「전봉준」, 「허균」 등의 시를 발표하면서 변화를 시도했고 이러한 변화는 1970년대로 이어져 자신만의 모더니즘으로 자리잡았다. 시집 『삼남에 내리는 눈』(1975)에 대해 문학평론가 김병익은 “초기의 고뇌에서 자기 삶의 내부로 비극의 비전을 비쳤던 그는 차츰 자기 밖의 세계에 대한 인식의 확대를 수행하면서 민족의 약소함과 황량한 우리 삶의 풍경을 묘사했고 이 참담한 상황을 더욱 공포스럽게 만드는 힘에 대한 분노와 자신의 무력감을 표명했다... 그의 사랑은 이웃으로 번지고 드디어는 삼남이 가냘픈 한국과 그곳에서 괴로이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로 확산되었다”라는 평을 하고 있다.
시집 『악어를 조심하라고?』(1986)는 실험정신이 돋보이는데 이 시집에서는 지적 시선에 의한 상상력의 조형이라는 단계를 뛰어넘어, 시인이 이 세계의 존재성과 거기에 얹혀 살아야 하는 인간의 운명적 구조를 투시하면서 그것들과 친화와 역설의 이중적 얽힘을 그의 언어로써 새로이 구성해내고 있다. 1995년 <현대문학>에 연작시 「풍장 70」을 발표하면서, 1982년에 시작한 연작시가 마감되었다. 황동규 시인의 죽음관에 대해서 대면할 수 있는 이 시집은 독일어판으로도 번역되었다. 그 이후로도 중량감 있는 시를 계속 발표한 한국의 명실상부한 대표적인 시인이다.


하응백(문학평론가) hbooks@empas.com


[인터뷰 영문판]

[Wide Interview]Freedom vs. Deliverance A Poet’s Sense of Identity



Ha Eung-baek: You have graduated from a department of English and studied abroad in Edinburgh. There are probably many poets in our country that studied English literature at university, but you went on to teach English Literature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and in a way you are someone who has used English all his life. With this background, what would you say are the fundamental differences between English or American poetry and Korean poetry?

Hwang Tong-gyu: The poetry of Western Europe has a much stronger sense of identity and sense of language than Korean poetry. However, our poetry has become very Westernized, so there isn’t much of a difference now. When I say “sense of identity,” I mean something that asks “How should I live?” This differs from individualism in that it revolves around questioning how I, as a human being, should live my life. This mode of thought is more prominent in Europe than in Korea’s poetry tradition. Wordsworth, Eliot, Yeats, and Rilke—they all have this theme.

Ha: You have worked both as a teacher and as a poet. Have you ever felt friction between the two?

Hwang: Art is unforgiving to teaching. You must show. There must be many people who have been taught through showing. Yet, there is a basic difference between showing and teaching. Having said that, there are many American and European poets who are employed in that most time consuming of jobs, being a university professor. They too must struggle. If you don’t, it is hard to make good poetry. I am not a magician, so it is difficult. You cannot say “now I will show you, and now I will teach you.”

Ha: You were born in 1938, which, to speak in a Korean context means you were born under Japanese colonial rule. When you were eight years old, you witnessed liberation in 1945; when you were thirteen, you lived through our people’s greatest tragedy, the Korean War; when you were at university, you experienced both the April 19th Revolution and the May 16th Coup. You have been faced with many important events in our country’s recent history. How does this historical background relate to your poetry?

Hwang: I don’t think my life has been smooth even now. In some ways, it is as if I have lived without knowing the true meaning of peace. Even after those events, our lives have never been peaceful because of the relations between the North and the South. These have all had an effect on my poetry and therefore you will not find the word “happiness” in my poems.

Ha: You say that, but after you reached middle age, words associated with happiness, such as “radiance” often appear in your work.

Hwang: More than to convey happiness, I used the word “radiance” to express the realization of what’s not smooth or the attitude that one can still love things that are not smooth.

Ha: So could “not smooth” be a figure of speech representing a bumpy, rough life?

Hwang: Yes. Young people these days might not understand, but there were many of us who could not live the way we wanted. For example, choosing one’s major (I didn’t always want to choose English Literature). I originally wanted to go to the College of Music and major in composition, but I couldn’t because I was never able to receive proper music education when I was young. At the time, there was no one to teach me, so I couldn’t learn. I had never even been able to touch an instrument, so I had to give up. I ended up picking what seemed to be the closest subject to music, poetry. You couldn’t read world literature then because reading English books meant learning English for six years, which was equivalent to going to England itself. You couldn’t just do as you pleased. After studying, if I had had the freedom to, I would have become a translator, not a professor. But I couldn’t refuse when I was offered a professorship. You couldn’t live as a translator then. There were lots of different mitigating circumstances like that. I don’t know if people would accept it now, but at that time we tended to naturally accept that fundamentally, life was not smooth.



Searching for Humanity’s True Nature

Ha: Am I right in saying that there is a poem from your early works written when you were in your twenties called “A Joyful Letter”? This poem might be a favorite among your readers.

Hwang:Thatisabitofapitytomesinceitisoneof my early works.

Ha: Many critics have looked at this poem and said it told a story of labor. Up until that point, love was often equated with “waiting.” Your position, like “If you leave, I shall wait,” was considered important, and from what I understand, one’s way of waiting is integral to this poem. However you look at it, it seems like this couldn’t possibly be something said by a twenty year-old. While this theme of waiting was common in traditional poetry, I would have thought that you wouldn’t have been capable of such literary insight at such an age.

Hwang: During the War, I discovered the true nature of extant love could not be resolved through waiting. At that time, no such thing as eternal love could be seen around me. I couldn’t speak of love the same way that the poets who came before me had. And I was also probably influenced by existentialism then. Although I probably didn’t understand existentialism, I must have picked up on its feeling or main elements. The existentialism understood in Korea at that time was more of the end-of-the-century version that had wandered a bit from its origins—possibly closer to end-of-the-century nihilism. Existentialism has an extraordinarily strong will. The basic principle of existentialism is that if humans are made by humans, doesn’t that mean there is no true nature? You are made by your choices. It must have been difficult to write truly existentialist texts in a country like ours that has never fought over the true nature of humanity.

Ha: After that, you published a series of poems called Elegy and another called Wind Burial. Compared with other poets, you have quite a few series. If that is the case, do you pick a particular topic and plan around it? Or is it somehow related to the time period?

Hwang: Of course I plan it all out. I have a desire to completely delre into whatever topic comes to me. Elegy was born from the struggle a person goes through when they lose their religion. I myself was Christian and had been baptized as an infant. In high school, I believed in my religion at the behest of my mother. So, of course there was some automatic resistance to it. For a whole year, the church I was attending said, “Jesus’ Second Coming is getting closer”; “it’s going to happen soon.” They usually focused on verses from Isaiah, Jeremiah, and Revelations that said, “Jesus will come again. And when he does, 144,000 people will receive his salvation. We are amongst that 144,000.” And then I went to university and while I was reading Nietzsche, I lost my Christianity, my religion.

Ha: When I was reading Elegy I felt something like the solemn darkness of younger days.

Hwang: It’s the darkness that comes when you lose your religion.

Ha: I believe that Wind Burial is about humanity confronting death. Do you agree?

Hwang: Yes, I do. It can be seen as man’s confrontation with death, or it could be seen as becoming more familiar with so-called “death.” It could be seen as confronting death, or even becoming intimate with death as it is all but inescapable. And when you become friendlier with death, you lose a lot of psychological burden. Even though you try to escape death, you never really can. It is saying, “If you can’t avoid it, enjoy it.” If you enjoy your life, then it greatly brightens and many of the fundamental burdens of life fall to the wayside. Just saying “If you can’t avoid it, enjoy it,” doesn’t mean that getting there is easy. You need a lot of training and go through a lot of trial and error.


Poetic Form and Music

Ha: Around the time when you were completing your Wind Burial series, a peculiar form appeared in your poetry. Could you please explain to us exactly what is “dramatic lyrical poetry?”

Hwang: If I were to explain it, dramatic lyrical poetry has to have something more inside it than most of the emotionally effusive, reporting on the present society, or painting pictures of traditions and customs, which are found in most of our country’s poetry. That is to say, what we call drama has the so-called four steps of composition: introduction, development, turn, and conclusion, and within that sequence one person’s fate changes. If it doesn’t change, there is no drama. And that is not simply emotional effusion or description. I want to write poems that change the poetic self, that experience change. The poem of mine that most represents this is probably “Joy of Living.”

Ha: That poem shows how the main character must change his way of life.

Hwang: Sometimes my concept of life and death changes. And it starts when I immerse myself in Zen Buddhism and read books on the topic. When I read them, I feel my perception shift between a type of Stoic devotion to valor and a sort of Epicureanism. However, Zen Buddhism has the attractive point of encapsulating two different Western concepts of life and death. I am completely captivated. It is wrong to think of Epicureanism as hedonism. To put it simply, Epicureanism has accepted Atomic Theory. We are so- called chance combinations of atoms and when we die, we are nothing. Trying not be disturbed by the thought of death is not hedonism. I mentioned Stoicism as well; you’ve got to have a grasp of both to reach Zen Buddhist Enlightenment. This is how you can explain perception in the Western European way.

Ha: In relation to that, you mentioned “lowering oneself,” but that doesn’t seem to be something written about in Europe.

Hwang: Right, when we talk about poets or writers and say, “That guy hasn’t lowered himself enough,” and use it to mean that something is missing. They don’t say this in Europe. This is something found in Taoism and Buddhism. In America, there is no concept of “lowering oneself,” however there is something similar in their “you need to see the world more broadly.” But “lowering oneself” is a term that includes a certain sensation as well. There are no such words in English, but you could even rephrase it as, “to empty one’s heart.” It has several meanings.

Ha: Didn’t you once say that when you have a drink you like to listen to music? What do you usually listen to?

Hwang: I like music without no lyrics. Music with words impedes the writing of poetry. So, I hardly ever listen to opera. I enjoy the later works of Beethoven, Schubert, Brahms, and Mozart. Schubert’s later works are his greatest masterpieces. His String Quintet and his last three Piano Sonatas are really his best works.

Ha: You gave up on becoming a composer, didn’t you?

Hwang: Yes, the reason I gave up my music studies was that, one day, coming out of a concert with a friend, my friend started whistling very precisely and I found I couldn’t whistle like that. They call it tone- deafness. It is okay for composers to be slightly tone- deaf. Penderecki failed his hearing test, but it isn’t a big problem for modern day musicians. As long as you’re not a vocalist, you’re alright. If I lived my life again under the condition that I had the same body, I might even have been a composer. I also think, perhaps if I were healthier, I would have been a traveler or an explorer.

기사 제공 = 한국문학번역원 http://www.l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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