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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수칼럼] '전라도 사람'으로 살기

최남수 보도본부장

필자는 '전라도 사람'입니다. 비빔밥으로 유명한 전주가 고향입니다. 가족사에는 우리 민족이 겪어온 고난의 흔적이 화석처럼 남아 있습니다. 아버님 가족은 1.4후퇴 때 평북 정주에서 남한으로 내려온 피난민입니다. 어머님 가족은 일제 시절 전주에서 중국 산동반도로 건너갔습니다. 어머님은 그곳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해방 후 전주로 다시 돌아오셨습니다. 이런 가족사 탓에 전 호남과 평북이 뒤섞인 문화 속에서 자랐습니다.

79년에 시골뜨기는 세상 물정도 모른 채 서울 유학길에 오릅니다. 집이 넉넉하지 못해 과외 교사를 해야 했습니다. 제가 맡은 학생은 고등학교 남학생. 이 학생을 소개해 준 지인은 당황스러운 말을 했습니다. "그 집에 가면 고향이 이북이라고 해야 한다. 부모가 영남 사람이라서 전라도 출신이라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 당시로서는 제가 왜 출신을 감춰야 하는지 그 뒤틀어진 사회구조의 틀을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뭔가 좀 이상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극단적 경험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비슷한 일이 몇 번 이어지면서 '전라도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스스로 갖게 된 자생적 의식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길들여진 피동적 피해의식이 자리 잡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런 관점이 생기다 보니 세상이 다시 보였습니다. 당시 고향에 내려갈 때면 편도 2차선 이상으로 뚫린 경부고속도로에서 편도 1차선의 호남고속도로로 들어서게 됩니다. 좁혀진 차선만큼 왜소한 전라도의 모습을 보게 됐습니다. 그러다 전두환 정권의 등장과 대학살이 저질러진 광주민주화운동을 목도하게 됩니다. 저 같은 호남인들의 집단적인 트라우마가 더 깊게 자리 잡게 된 것이지요.

호남 차별이 통일신라나 고려 시대 때부터 시작됐다든가 하는 역사적 언급은 부차적입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직간접적으로 겪은 호남 소외 또는 차별에 대해서는 일일이 언급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 선배나 동료, 후배들이 주요 공직이나 기업에서 불이익을 받고 사는 모습을 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많이 알려진 사실이어서 되풀이하지 않겠습니다.

미국에서 살 때 일입니다. 인종차별. 그걸 단어로 이해할 때와 실제 겪을 때는 정말 차원이 다릅니다. 마트에 갔을 때 백인에겐 친절하던 매장 직원이 퉁명스럽게 말하며 물건을 툭툭 던지며 계산할 때, 행정관서에 가서 노골적인 무시를 받을 때. 같은 사람이고 사회적 지위로 따져도 푸대접을 받을만한 상황이 아닌데 피부색만으로 하대를 받을 때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은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차별은 이런 겁니다. 가해자는 가볍게 하는 행위일지 모르지만 피해자에게는 그 몇 배의 상흔이 가슴에 새겨집니다. 그것도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겪게 되면 뿌리 깊은 트라우마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에겐 누구나 '손실회피 성향'(aversion of loss)이 있습니다. 100을 손에 쥘 때 느끼는 기쁨보다 100을 잃을 때 느끼는 상처가 훨씬 큽니다. 피해의식의 골은 이렇게 두터운 것입니다.

선거 때마다 나오는 호남의 몰표를 보고 손가락질만 할 일이 아닙니다. 그 표 뒷면에 실린 전라도 사람들의 깊게 패인, 치유되지 않은 아픔을 봐야 합니다. 누가 달래고 낫게 할 수 있을까요. 전 영남 출신의 대통령만이 이 숙제를 풀어낼 수 있다고 봅니다. 가해와 피해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호남의 상처와 눈물을 짊어지고 눈물을 닦아주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말했습니다. 임기 내내 인재 등용과 개발 등 다양한 측면에서 이 말이 그대로 실행된다면 지역 간의 큰 틈새는 상당히 메워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라도 사람들도 여기에 화답해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이 보인 용서의 마음을 펼쳐 보일 수 있지 않을까요. '아따, 긍게 정말로 하나가 돼부린 우리나라를 보고 싶당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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