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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수 칼럼] 조선업 ‘선제 대응’ 그 신기루

최남수 대표이사

위기의 조짐은 처음엔 미세하게 깜박거린다. 이 신호를 민감하게 읽어내는 것과 불감증에 빠져있는 것의 차이는 나중에 가는 길을 완전히 딴판으로 만든다. 조선업에 나간 여신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선수금 환급보증(RG)이 그랬다. 발주처로부터 선수금을 받고도 배를 만들어 넘기지 못할 경우 금융기관들이 대신 돈을 물어줄 것을 보증하는 RG. 수수료 수입이 짭짤한 이 상품에 많은 금융기관이 취했다. 빨간 불은 2006년쯤부터 켜지기 시작했다. 국내 조선사들의 저가수주 경쟁이 본격화하면서 일부 조선사가 선수금을 턱없이 적게 받기 시작했다. 50%선이던 발주금액 대비 선수금 비율이 30%선까지 떨어졌다. 빚을 늘려 배를 만들겠다는 위험한 게임이 펼쳐진 것. 우리은행은 이상신호를 감지했다. RG 취급액을 줄이는 등 조선업에서 발을 빼기 시작했다. 달콤한 ‘독버섯의 맛’에서 헤어나지 못한 일부 금융기관과 대조적인 행보를 보인 것이다.

선제대응을 잘 보여준 사례다. 하지만 미리 손을 쓰지 못해 수렁에 빠져든 경우가 더 많다. 위기의 뇌관을 사전에 없앨 선제 경고와 대응은 거의 항상 작동하지 않았다.

조선업의 부실화 과정은 글로벌 조선경기의 냉각, 한국 업계의 경쟁력 약화, 분식회계 같은 범죄행위, 주채권은행의 부실감독 등 요인이 복잡하게 섞여 있다. 법규를 어긴 행위에는 엄격한 처벌이 뒤따라야 한다. 채권은행들의 부실 방조에도 책임을 분명히 물어야 하고 관련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저가 중국 배의 공세에 밀리기 시작한 2008년 이후 한국 조선업 전반의 바닥 균열에 대해 왜 경고음이 울리지 않았을까. 산업구조나 기업 경영 측면에서 왜 선제 대응이 이뤄지지 않았을까. 아니 먼저 움직여 문제를 사전에 막는 일을 왜 잘 볼 수 없는가. 사태가 악화될 대로 악화된 후 그럴 줄 알았다는 사후확신편향이 주류를 이루고 사전 경고음이 없었음을 탓하는 것은 수없이 되풀이된 일이다. 그래서 현재 제도, 기관, 개인의 ‘인센티브의 시계’가 미리 대비하는 데 맞춰져 있는지 짚어봐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방향으로 당사자들을 움직이게 할 유인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그 장치를 마련하는 데 머리를 싸매야 한다.

자발적인 선제 대응은 무엇보다 동기의 문제다. 큰 걸림돌 중 하나는 미래 예견력 부족. 나빠지는 업황 속에서 미래는 어디까지나 확률의 차원이다. 상황이 좋아질 가능성도 있고 현상유지나 심각한 악화의 시나리오도 전개될 수 있다. 이때 최악의 전망 하나를 선택해 논란을 일으킬 수 있는 집도에 나서는 건 쉽지 않은 일. 정부 한 관계자는 “시장보다 산업을 잘 모르는데 어떤 조치를 미리 취해 충격을 주는 일은 정말 어려운 선택”이라고 고백한다.

책임의 문제는 이보다 더 현실적인 셈법. 선제적으로 솔직하게 병세를 알리고 재무나 산업구조 측면에서 대수술 작업을 하려고 할 때 정책당국자, 채권금융기관, 기업주가 느끼는 압박감은 무엇일까. 잘 한다는 박수를 받기보다 지금까지 뭐 했느냐고 몰아칠 책임추궁의 거친 목소리가 아닐까. 정책 실패, 잘못된 여신 집행, 그리고 기업주의 무모한 경영판단이 부각되면서 책임논란이 거세게 일 것이다. 사후 수습보다 예방조치가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표가 안 나는 사전 대응조치에 보상을 해준 일이 얼마나 있었던가.

선제 대응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무엇일까. 그걸 해도 괜찮을 것이라는 ‘안도감의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경고등을 켜고 궤도수정에 나서는 ‘착한 실패’와 새 출발의 노력을 인정하고 지원하는 사회적 분위기 조성과 제도 개선이 핵심이다. 정책당국자와 채권 금융기관 관계자에 대한 면책조치 등이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도 그게 가능한 여건을 만들지 못한다면 선제 대응은 여전히 손에 잡히지 않는 신기루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곪아터진 상처를 보고서야 ‘선제 대응의 부재’를 타박하는 일을 언제까지 반복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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