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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의 굴욕에서 배우는 묵직한 교훈

송예슬 인턴기자

(사진=영화'남한산성'스틸컷)

인조가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실행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수도 있다. 강대국들 틈 사이에서 위기를 겪고 있는 작금의 한국세태는 비단 처음이 아니다.

1636년 12월, 청 태종은 약 10만 명의 군대와 함께 남하한다. 우리민족에게 삼전도의 굴욕을 안긴 병자호란의 시작이었다.

당시 왕이었던 인조는 청의 군대를 피해 남한산성으로 숨어든다. 주화파는 청에게 항복해 후의를 도모하고자 말했고, 척화파는 항전을 주장했다. 최종결정권자였던 인조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항복과 항전 단 두 가지였다.

애초에 인조의 선택지는 더 다양했을 수도 있다. 인조는 광해군의 균형외교를 폄하하며 반정을 일으켜 왕이 된 인물이다. 왕권을 잡은 인조는 명과의 친선을 강조하고 후금(훗날 청나라)을 배척하는 '친명배금'정책을 취했다.

당시 정세는 인조의 뜻과는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명은 국운이 끝나가는 지는 해였고 후금은 떠오르는 해였다. 강성해진 후금은 정묘호란을 일으킨다. 후퇴를 거듭하던 조선은 ‘오랑캐’라 무시하던 후금을 형으로 모시게 된다.

친명을 외치며 반정을 일으킨 왕이니 그 족쇄를 쉽게 떨치기 어려웠던 것인지 정묘호란 후에도 조선의 정책들은 명나라를 향했다.

명과의 대의를 지켜야한다는 척화파는 청과의 화친을 주장하는 주화파를 '오랑캐 세력'이라 낙인찍기 일쑤였다. 명분만을 강조하며 새로운 의견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정세를 제대로 가늠하지 못했던 인조와 척화파의 태도는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으로 돌아온다.

사극은 과거에 빗대 현재를 조명한다. 병자호란을 그린 영화 ‘남한산성’의 황동혁 감독은 "380년 전 역사와 현재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구나 싶었다"며 한국이 역사를 답습하고 있음을 말했다.

병자호란은 작은 나라일수록 국제정세 흐름에 유연하게 대처해야지만 국가와 국민을 보호 할 수 있다는 뼈아픈 교훈을 준다.

현재 한국은 사드배치, 원자력발전소 등 사회적 합의를 필요로 하는 사안 외에 문화계 블랙리스트, 국정원 '댓글부대' 등의 복잡한 국내현안에 직면해 있다. 더불어 일촉즉발의 북미관계, 미국-중국 힘겨루기, 일본의 '평화헌법'개정 움직임 등 어지러운 국제정세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

변화무쌍한 국제사회에서 하나의 원칙을 고집하는 것은 어리석은 결정이 될 가능성이 크다. 병자호란은 어느 때보다 현명하고 유연한 판단을 필요로 하는 한국에 경각심을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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