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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리뷰] 소설과 현실 사이, 연애를 둘러싼 절묘한 기시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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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명의 필자들이 사랑의 문제를 둘러싸고 소설과 현실 사이에서 오고 가는 사적인 이야기 또는 감상평을 털어놓은 집단 에세이집, ‘연애소설이 필요한 시간’이 나왔다. 각기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저마다 독특한 경험을 털어놓고 있지만, 동시에 자기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게 만든 소설 한 두 권을 자신 있게 소개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1772년 칼 빌헬름 예루살렘은 사랑 때문에 자결했고, 이 이야기를 들은 괴테는 2년 뒤 사랑 때문에 권총 자살하는 젊은 베르테르의 이야기를 썼다. 다시 4년 뒤 크리스티네 폰 라스베르크는 이 책을 읽고 괴테의 집 뒤 일름 강에 투신했다. 소설과 현실이 사랑이라는 주제를 공유하며 비극적으로 뒤섞인 경우다. 이 책에 소개되는 필자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 소설에서 현실의 기시감을 느낀 경우다.

영화감독 정성일은 애써 “연애소설이 필요한 시간이란 언제나 실연당했을 때부터”라 장담한다. 긴 겨울에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글(『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꼭 길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이 적당하며, 봄날이라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어야 할 것이며, 장마철이라면 나쓰메 소세키의 『행인』이 필수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어느 봄날 이별을 통보받았을 때는 저 소설을 다시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소설에서 현실을 다시 직면할까봐 두려웠던 탓일까.

싱어송라이터 요조는 김승옥의 단편 「야행(夜行)」에서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은 여주인공을 만났다. 소설에서 현주(요조는 ‘현정’이라 적었지만 원작에서는 현주다)는 엉겁결에 백주대낮에 겁탈당한 뒤 밤이면 누군가를 찾아 거리를 방황하는데, 요조는 밤이면 “아무라도 좋아” 하며 파리의 거리를 지치도록 방황한 적이 있다.

만화가 김보퉁은 고등학교 3학년 때 눈썹이 유난히 짙고 숱이 많은 단발머리 여자아이와의 ‘엉망진창’ 영화 데이트 끝에 너덜너덜해진 전단지만 쥐고 돌아 온 기억이 있다. 김보퉁은 그 때 장 자끄 상뻬의 『속 깊은 이성친구』를 읽었더라면 그처럼 처참한 수준의 데이트를 하진 않았을 거라 후회한다.

기생충학과 교수이면서 작가로도 유명한 서민 교수는 우여곡절 끝에 첫 사랑 대신 ‘그녀’와 결혼했다. 그렇지만 신혼여행부터 순탄하지 못했고 일 년도 지나지 않아 별거에 들어간다. 『사랑이 달리다』(심유경 작)의 주인공 성민이 꼭 그랬다. 아내는 성민이 좋아서가 아니라 부모의 성화에 쫓겨 결혼했고, 둘은 대부분의 생활을 섹스리스로 보낸다. 소설과 현실은 주말부부로 사는 것도 닮았다.

하지만 연애소설에서 이러저러한 삶의 흔적들만 발견한다면 꼭 그것을 읽기 위해 시간을 낼 필요가 있을까? 그것들이 어차피 우리 삶에서 차용되고 채색된 것들일 테니 말이다. 요조의 글은 이런 점에서 “연애소설이 필요한 시간은 꼭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요조가 읽은 김승옥의 「야행」에서 현주는 ‘남편’과 동거 사실을 숨긴 채 같은 직장에 다닌다. 그로 인한 죄책감 때문에 오후 3시의 육교 위에서, 말없이 손을 잡아 끄는 남자에게 저항 한 번 못하고 끌려가 봉변을 당했다. 이상한 것은 시간이 지나자 그 기억이 ‘욕구’의 유혹으로 되살아나 스스로 밤거리에 나섰다는 사실이다.

요조는 ‘외로움이 징그럽다’고 느끼면서부터 거기서 벗어나려고 스스로 밤길을 헤맸다. 현주는 그러다 정말 어떤 남자에게 손목을 잡혀 끌려가게 되었는데, 남자가 자신을 보는 순간(곧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본 순간) 욕구를 채울 수 없음을 직감했다. 욕구를 ‘의식(儀式)’이라 포장된 무분별한 섹스로 해소하려다가는 결국 파멸에 이를 뿐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기 내면의 의지에 기대지 않는 한 구원은 오지 않는다. “유혹을 여자가 겁내는 까닭은 그것이 내부에서 오기 때문이었다.” 소설에서 김승옥은 이처럼 정곡을 찔렀다. 그리고 요조는 이 글을 읽다, 문득 자신도 부질없는 속임수에서 벗어나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녀는 서둘러 서울로 돌아갔고, 아마 그녀를 괴롭히던 외로움도 사라졌을 것이다. 1969년 대작가의 이야기 속에서 현주가 그러했을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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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애소설이 필요한 시간 : 진짜 연애는 아직 오지 않았다’ = 요조, 김보통, 박현주, 정지돈, 김소연, 서민, 황인찬, 이도우, 백민석, 김민정, 박준, 김중혁, 안은별, 김종관, 배명훈, 정성일, 금정연, 정세랑, 박솔뫼, 주영준 저. 부키. 320쪽. / 분야 : 에세이 / 값 12,000원



김선태 기자 kstkks@me.com

[MTN 온라인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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